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크라이나-리투아니아 관계 (문단 편집) === 리투아니아 대공국 === 두 나라의 연결점은 [[키예프 대공국]] 멸망과 뒤이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팽창에서 시작된다. 키예프 공국이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멸망한 이후 [[루테니아]]의 여러 공국들은 킵차크 칸국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는데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이러한 공국들을 하나씩 병합하면서 우크라이나 대부분 지역을 석권하였다. 리투아니아 세력은 루테니아 영토를 합병할 때면, 언제나 지역 주민들 특히 지역 기득권들에게 자치를 허용하고 지방 법률을 보존하며 상인들의 재산을 건드리지 않는 영민함을 보였다. 14세기 말 이전 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전 발트 신화를 믿었던 시기에는 [[정교회]]를 믿는 루테니아의 지도층들과 자주 통혼하였다. 14세기 [[게디미나스]] 치세의 리투아니아는 우크라이나 방향으로 진출하여 과거 키예프 공국에 해당하던 영토 상당수를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 우크라이나 공령들은 전쟁이나 투쟁도 없이 조용하고 눈에 띄지도 않게 하나씩 차례로 리투아니아 대공들의 권력 아래로 넘어갔는데, 심지어 우크라이나의 사료에서 이 같은 사실을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리투아니아 공들이 큰 힘 들이지 않고 공령들을 합병하곤 했기 때문에 그러했다. >---- > 우크라이나의 역사 /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 게디미다스의 사망 이후 아들 [[알기르다스]]는 타타르인들로부터 [[키이우|키예프]], [[비텝스크]], 체르니고프([[체르니히우]]) 지방 및 [[스몰렌스크]]를 정복했다. 알기르다스는 마침 동시기에 똑같이 통일을 이룩하고 확장에 매진하던 폴란드와는 루테니아 지방을 놓고 확장 경쟁을 벌였으나, 결과적으로 승자는 리투아니아 쪽이었다. 게디미나스의 아들 알기르다스가 사망한 1377년에 이르면 리투아니아는 발트 해에서 흑해까지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지닌 유럽의 대국으로 자라난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 확장은 15세기 초까지 지속되었다. [[비타우타스 대공]]은 1392년부터 1430년까지의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다스리며 리투아니아 역사상 가장 큰 영토 팽창을 이루었다. 이를 반영하듯 15세기 중반까지 리투아니아의 연대기 작가들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이야말로 [[키예프 대공국]]의 진정한 계승자라는 입장에서 연대기를 저술하였다. 영토를 확장했으나 리투아니아 본토가 [[튜튼 기사단]]의 계속되는 공격으로 위험에 처하자 [[브와디스와프 2세]]는 [[야드비가]]와의 결혼을 통해 [[폴란드 왕국]]과 [[동군연합]]을 구성한다. 폴란드인 성직자들이 빌뉴스 등에 정착하며 발트 신화를 믿던 리투아니아인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루테니아]]인들과 종교적으로 좀 더 거리가 벌어졌다.[* 물론 이교와 정교회 자체의 종교적 거리가 더 멀지만 과거에는 이교를 믿는 리투아니아인 귀족들과 정교회를 믿는 루테니아 귀족과의 통혼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 가톨릭과 정교회 사이에 갈등은 이런 점에서 발트 신화를 믿던 시절보다 루테니아인과 리투아니아인 사이를 더 벌려놨다.] 빌뉴스의 리투아니아인들은 폴란드어를 사용하고 폴란드인들과 결혼하면서 시간이 지나며 상당수 시민들이 완전히 폴란드인들과 동화되기 이르렀으며 리투아니아 귀족들의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리투아니아의 우크라이나 정복은 결과적으로 폴란드의 우크라이나 지배를 부른 셈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